오늘 하루 북유럽

저녁을 먹으러 강의실을 나섰더니 눈이 소복히 쌓였다. 날씨도 춥고, 눈도 끈적해서 그런지 차에 눈이 얇게 코팅되었다. 귀찮아서 와이퍼로만 삭삭 긁어냈더니 부채꼴 두개만큼만 밖으로 열렸다. 아- 이런 날엔 궁무리 제격이지. 순대국밥을 먹으러 차를 살살 몰았다. 오늘은 일요일이기도 하고, 또 워낙 조용한 동네기도 하고, 이번 눈은 사람들을 굼뜨게 만들었다. 뜨거운 궁물을 눙물이 날정도로 맛있게 삼키고 다시 설설 기어 들어왔다. 잠깐 바퀴가 헛돌기도 했지만, 그래도 차선도 보이지 않는 길을 2단 기어만 넣고 뚜벅뚜벅 잘 끌고 왔다. 옥상에 잠깐 올라가보니 아무도 밟지 않은 눈이 옥상 전체에 소복히 깔려있었다. 막 정리해놓은 이부자리마냥 곱디 고왔다. 발자국을 꽁공꽁 내고 들어왔다. 언덕길을 절절절 올라가는 차들이 안쓰러웠다. 길에 바퀴자국들이 나 있지만 그대로 내일 꽁꽁 얼겠지. 열두시 시그널을 차 안에서 듣고 집 대문앞 복도에서 용운동 동네를 내려다 보았다. 차 위에 눈이 그대로들 남아있고, 길도 하얗고, 사람도 별로 없고, 가로등만 멀뚱히 켜져있는 광경이 들어왔다. 플랑드르 화가.. 그 누구냐.. 브뤼겔의 겨울 작품이 떠올랐다.

택시들도 빈 채로 조심조심 돌아다니며 매의 눈빛으로 승객을 찾지만 다들 일찍 들어갔을테고, 지나가다가 들여다본 막걸리집은 추운 날 온기를 바라는 외로운 사람들이 모여서 흰 소리들을 하고 있는지 창문 안의 따순 습기가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렛미인>에 나오는 스웨덴의 겨울 풍경이 떠올랐는데, 어딘가 실내에서 콧김을 뿜어대며 모여있고 그 앞 골목에선 뱀파이어가 따뜻하게 헌혈받으며 몸을 녹일 것만 같다. 오늘밤은 북유럽의 밤같은 느낌이 바투 다가왔는데, 아아 이런 날이 몇달동안 계속되겠지? 라고 생각하니까 이민 못갈 것 같다.

집에 들어와서 하루 마무리 맥주를 땄다. 한참만에 다시 수입된 Duvel. 파울라너 살바토르같은 복비어가 오늘같은 겨울밤에 더 어울리겠지만, 아쉬운대로 듀벨을 땄다. 알콜이 8.5도나 되니까 후근후끈 알콜기운이 솟아나 어흥- 캘로그 콘프로토스가 부럽지 않았다. 인제 시험이 얼마 안남아서, 구도자의 삶을 살고 있다. 북유럽에 외국인 노총각으로 가게 되면 오늘 하루에 수십을 곱한 날을 1년에 살겠지? 음, 괜히 사서 걱정하고 있네. 당분간 인터넷에 잘 못들어올 것 같다.

by 데스땡 | 2009/12/28 01:16 | Life | 트랙백 | 덧글(1)

여러가지

1.
향일암이 전소되었단다.
http://media.daum.net/culture/view.html?cateid=1010&newsid=20091220100404453&p=yonhap
이런 십라. 향일암은, 국내 여행지중에 가장 좋았던 곳이었더랬다. 대학교때 친구들과 답사랍시고 줄레줄레 갔던 곳이었다. 서울역애서 야간기차를 타고 여수에 내려 버스를 두번갈아타고 올라갔다. 한여름 날씨였지만 향일암 올라가는 계단을 가위바위보로 올라가기도 했다. 그냥 view가 좋은 곳. 이라고만 예상했는데, 암자로 올라가는 건축적 시퀀스가 정말 대박이었다. 좁은 바위틈으로 빠져나오면 숲이 펼쳐지고, 시야가 나무에 가로막혔다가 180도 방향을 틀어 올라가면 갑자기 내 눈앞에 바다를 펼쳐냈다. 일부러 그런건지, 공간을 쥐었다 폈다 늘였다 줄였다 대박이었다. 대웅전 왼쪽 약수터에서 물을 한모금 마시고 위쪽의 암자로 올라갔다. 역시 바위틈으로 길이 나있고, 새로운 뷰도 올록볼록했다. 작은 집에서 스님이 참선을 하고 계셨고, 우리는 소리를 내지 않고 절집옆에 앉아있었다. 남해가 태평양처럼 펼쳐졌다. 내 생에 가장 넓은 바다였다.

근데, 전소되었다고? 이것도 다 명박이 때문? -_-;



2.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정도까진 아니지만, 누군가와 공유하지 않는 개인적 습성에 대해서, 남들은 어떻게 하나 하등 궁금하지도 않을 수록 큰 놀라움을 느낄 때가 있다. 예를 들어, 경향성의 문제이긴 하지만, 남자들은 티셔츠를 머리부터 벗는다거나 여자들은 팔부터 뺀다거나. 뭐 이런게 한둘이겠느냐만은 난 딴지일보의 어떤 기사를 보고 태풍같은 충격에 휩싸였다.

특히나 닦음질에 관하여서는 남성들은 대부분 뒤→앞 닦기임에 반해 여성들은 앞→뒤로 닦는다는 것도 알게됨으로써 여성문제에도 더욱 큰 관심을 가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본문 링크)


진짜? 진짜진짜진짜? 남자들은 뒤에서 앞으로 닦아? 아, 갑자기 뭘 닦는지에 대해 안썼구나. 입을 닦거나 유리창을 닦는 거였으면 내가 남들은 어떤지 알아챘겠지. 정말 개인적이고 폐쇄적인 행위라서 남들이 어떻게 하는지 몰랐을수밖에. 아, 똥닦는 얘기다. 하여간 대충격이었다. 뒤에서 앞으로 닦으면 휴지를 한번만 사용하고, 튕겨내는 힘을 저항하지 않은채 바로 변기속에 빠뜨리는 걸까. 아니면 다시 떨어지지 않게 잡은 후에 한번 더 접는걸까. 그 자세에선 팔로 미는 행동보다 당기는 동작을 더 미세하게 컨트롤할 수 있지 않나? 아 충격이다.



3.
슬픈 얘기와 더러운 얘기 다음에 나올 얘긴 아니지만,
봉하오리쌀을 샀다. 마침 쌀을 살때가 되었고 봉하쌀도 먹어보고 싶었다. 노통의 냄새가 난다던 봉하오리쌀을 보니 눈물이 났다. 밥은 정말 맛있다. 근데 왜 욕이 나오지. 개자식들.

by 데스땡 | 2009/12/20 11:25 | 트랙백 | 덧글(26)

에반게리온 나도 봤다.

에반게리온: 파 破
오가타 메구미,하야시바라 메구미,미야무라 유코 / 안노 히데아키,츠루마키 카즈야
나의 점수 : ★★★★★





어떤 긴 말이 필요하겠냐만은, 아아 에반게리온!
난 뭘해도 센트럴도그마까지 들어가지 못하는, 수박겉핥다가 혀에 바늘이 돋아버릴 잡학다식을을 추구하는 사람이라서 에바를 보고 신나게 오덕질을 하진 않았다. 그래도 멀티미디어중 불만가득한 내 사상에 영향을 미친것 세개를 꼽으라면, 에반게리온, 엑스파일, 매트릭스를 빼놓을 수가 없다. 십대후반부터 이십대초반까지, 한 인생에서의 발명은 그때 나온다지. 그래서 난 이렇게 투덜이가 되어버렸고. 요새 세대들도 나름대로 즐길 거리가 있겠지만은, 에반게리온, 엑스파일등을 실시간(에 가깝게)으로 즐길 수 있었던 79년생임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왠만해서 가사를 까먹지 않는 그 시절의 노래들도 꼭 포함하자.)

우려먹고 우려먹는 사골게리온이든, 돈코츠게리온이든간에 간만에 보는 에바는 내 속의 소심한 소년 신지를 깨어냈다. 세상따위 상관 안할꺼라고! 내 행복을 찾고 싶다고! 오오오. 바카 신지쿤. 이번에도 그닥 행복하진 않지만 너에겐 소류 아스카 랑그레이와 아야나미 레이가 있잖아. 근데 신극장판의 등장인물들은 예전에 비해 왜 이렇게 밝아지고 속내도 잘 드러내는거야. 영화를 보고 어리둥절할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지만, 예전에 비해 다들 조금은 행복해진 것같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극장아래 버거킹에서 예방의학공부를 하며 기다리다가 6관으로 올라가는데, 이건 뭔가 아니다싶어 주위를 둘러보니 남남, 여여, 남남남남 커플들이 나와 같은 곳으로 가는 거 아니겠어? 아, 이건 누가봐도 오덕십덕이 분명한 그들, 다 어디에 버로우하고 있다가 불빛비추면 나오는 나방마냥 기어나온거야! 요새 아스카를 울부짖는 레진블로그에서 cgv에서 일하는 사람이 덧글을 달았는데, 옷좀 잘 입고 다니자고, 저 멀리서 걸어오기만해도 에반게리온 보러오는 거라는게 티가 확나는 오덕들을 비판하기도 했지. 핏 안 살아있는 일자바지에 엉덩이를 덮는 잠바 혹은 사파리, 속엔 폴라티셔츠, 역시 핏 안 사는 어정쩡한 야구모자, 걸걸한 목소리로 떠드는 호들갑, 운동화 혹은 랜드로바, 여자의 경우 '난 남자따위 관심없어. 아니면 남자끼리 하는 것만 관심있기도 하지.' 분위기를 폴폴.. 아아아악. 극장에 들어가니 난 포위당했지. 개봉한지 꽤 지나서 대전에선 그럴일이 없겠지만 처음 개봉했을 땐 왠지 박수라도 쳤을 것같아. 영화끝나고 엔딩크레딧 올라가는데 나오는 노래를 옆에선 따라부르고, 미사토의 사비스사비스~를 보기 위해 정말 90% 이상이 다 앉아 있어!!!! 난 에반게리온을 독학하길 잘 한 것같아. 궁금한게 있을때 나우누리 에바 동호회에 가서 찾아보긴 했어도, 덕후 네트워크에 들어가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인지. 하긴, 그러고보니 엑스파일도 그냥 혼자 독학했구나.



나약한 어린아이(20대초반)에 보았던 에반게리온과 달리, 지금은 미사토랑 친구먹을 나이가 되었구나. 근데 저런 중요한 작전을 내 나이또래가 지휘해도 되는거야? 세컨드 임팩트이후로 조로증이 번지기라도 한건지. 그때 29살 미사토는 정말 어른처럼 보였는데 말이지. 그리고 14살짜리 애들의 발육이 어찌나 그리 좋은지. 안노 히데야키는 야동매니아임에 틀림없어, 아스카가 팬티만 입는 컷에서 카메라의 관점이나, 운전하고 있는 미사토의 짧게 올라간 치마를 비추는 신 등등에서 남자의 욕망을 자극할 줄 알더라고. 뭐 그래서 아스카나 레이나, 탁탁탁의 마스터피스가 된 것이긴 하겠지만.



내용에 대해선 별로 한 말이 없네. 시작하면서부터 정신놓고 봤다. 사도의 기하학적 모습은 아름다웠고, 원작이랑 달랐던 부분이나 같았던 부분이나 다 좋았다. 마지막에 신지가 아빠한테 '전 에바 초호기의 조종사, 이카리 신지라구요!'라는건 쫌 이상했지만 다른 부분에선 내 잡념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넋놓고 재밌게 봤다. 굽시니스트님의 포스팅을 보면 모든 사람들의 반응이 그랬구나.. 할끼야. 마지막 부분에선 캐충격을 먹었는데, 오늘 살펴보니 아스카가 죽은게 아니네? 휴- 다행이야. 마지막 장면을 보고서, 어라? 이거 어떻게 수습하려고 이러나 싶었다. 양산형 에바는 어쩌려고? 간만에 봐서 '카지 료지' '마르두크 보고서' 등등 기억속에 잊혀진 것들을 다시 공부해야 하나 싶었지만 그냥 시간 가는대로 흘려두련다. 나중에 한번에 서+파+Q+등등을 몰아서 봐야지? 아 오덕냄새.



아, 중요한걸 빼먹어서 추가하자면, 아스카 포스터를 준다니까 조조가 매진되었다며-_-;
내게 미사토가 새겨진 에비스 에바 한정맥주를 팔아달라!! 박스오 사다 마시게!!!
예전엔 그게 에비스맥주인지도 몰랐지. 어헣헣..

by 데스땡 | 2009/12/16 12:47 | | 트랙백 | 덧글(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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