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호걸의 연애레전드 by 데스땡

시간은 왠지 항상 부족했다. 약간 감기기운이 있던 그이는 옆에서 내 손을 잡고 잠시 잠들었었다. 행여 깨울세라 잡고 있던 손도 꼼지락 거리지 않았다. 고개, 어깨, 허리 다리, 발가락.. 심지어 소장의 융털과 콩팥의 사구체까지. 난 가만히 멈춰있으니 온 몸에 담결리는줄 알았지만 뽀얗게 쌕쌕거리며 잠든 사람을 지지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파르테논 신전의 기둥도 행복할 것이란 생각을 했다. 음 그 기둥처럼 내 배도 흘러내리고 있었고.

그러다가 허둥지둥 기차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고 후다닥 영등포역으로 돌진을 했는데, 시간이 어정쩡해서 내가 내려가는 그 시간이 딱 저녁시간이었다. 뭐라도 내 입에 물려놔야 안심이 된다던 Q님은 이때부터 15분 계획을 세웠나보다. 롯데백화점 지하 델리코너에서 음식을 사고, 잠시 영등포역 지하상가에 들렀다가 영등포역으로 올라가 발권을 시키고 날 승강장으로 집어넣을 그 서사를 꾸미고 있었던 거다.



조조는 형주의 땅부자, 유표가 죽은 틈을 타서 양양으로 진격한다. 오호- 이제 형주가 대세야. 땅값이 팍팍 오를테니까. 강동구쪽의 손권보다 우리가 먼저 알박아야지. 하는 마음에 접수를 하러 가는거다. 때는 208년이었다. 유비는 허겁지겁 쫓겨 도망다니다보니, 정신을 차린 후엔 이미 안드로메다. 따라온 백성들과 자신의 가족들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그런 상태였다. 핸드폰도 안터지고, 중요길목은 전경들이 막고 있어서 맘대로 갈 수도 없어 어찌해야 하나 징징거리고 있자니, 역시 상산의 조자룡이 나선다. 주군, 주군의 꼬꼬마. 그러니까 지력-무력-매력-정치력 어느하나 뛰어나지 못하고, 유약한데다가 결국 환관과 간신의 틈에서 우유부단 촉나라를 말아먹는 그 유선 - aka 아두 -를 제가 구해오겠나이다. 하지만 눈앞엔 조조의 백만 대군. 비켜달라해도 비켜주지 않는다.

이때 조자룡은 중고가게에서 괜찮은 조건에 득템한 헌창을 쓰며 백만대군을 뚫고 아두와 감부인을 찾아내고 만다. 이탈리아 이민자인 감베로니 감부인은 짐이될까 우물에 몸을 던지고, 그 아둔한 아두는 조자룡의 품에 구출된다. 다시 조자룡은 많은 사람 사이를 뚫고 지나간다.




주말의 백화점 지하 & 부도심 영등포역의 자하는 붐볐다. 시간은 없었다. 난 이 저녁을 먹느냐 못먹느냐에 따라 다음날 살아남느냐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져있었으니 유비가 유종을 통해 대를 잇느냐의 문제는 참 사소한 것이었다. 정문에서 심호흡을 한 Q님은 맹렬히 돌진하기 시작했다. 잘 빠진 액션영화의 시내추격씬? 훗. 그보다 더 짜릿한 속도감이 내 옆으로 지나갔다. 어찌나 빠르던지 난 옆의 상큼이들에게 한눈을 팔 정신조차 없었으니까. 막 마감세일을 시작한, 3개 10,000원짜리 도시락을 내 품에 안기고 또 다시 선두를 맡아 돌격했다. 한 손은 내 손을 잡고 나머지 한 손은 앞에 가고 있는 사람들 사이를 갈라넣어 길을 만들었다. 결국 롯데 지하를 뚫고 나오는데 성공했고. 내 끼니는 이어지게 되었다.




조조는 갈곳없는 천애고아 관우와 합ㅋ방ㅋ하려 환심을 사고 싶었다. 어화둥둥 우리 관우, 수염이 뽀송거리도록 비달사순 수염케어셋트를 사줄까, 붉은 눈썹 다듬을 펜슬을 사줄까, 청룡언월도 반짝거리게 닦을 맥과이어 광택제를 코스트코 회원할인가로 사줄까 어르고 달래봤지만, 관우는 일편단심이었다. <조조 횽아, 환심은 고맙지만 난 후로게이라능~ 내겐 마성의 게이 유비횽아 밖에 없다능~ 저는 단연코 현덕후임> 요 지랄을 떨고 있으니, 조조 결국은 야시시한 빨강의 레드 프레젠토를 꺼내기로 한다. 그건 바로 (애마부인이 많이 부비부비했던) 적토마. 후로게이 관우라도 武人이다보니 밀덕 아니 말덕도 겸하고 있었다. 빨강의 레드를 보니 구릿빛 관우의 얼굴은 홍조를 뚸고 아잉좋아. 조조는 이 순간만을 기다렸어, 드디어 관운장과 요앞 모텔 관운장에 들어갈 수 있겠구나. 장안을 함락시키고 하북을 무너뜨릴때보다 더 짜릿한 바람둥이 조조. 하지만 관우는 <아아, 요 빨강의 레드를 타고 우리 유비횽아에게 누구보다 더 빠르게 더 높이 다가갈 수 있을꺼야. 일씨구 현더쿠> 말타고 그이에게 달려갈 그날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슬리퍼 사주세요-
이상하게, 선울을 줄땐 그동안 다람쥐처럼 모아놨던 상품권이 하나도 안아깝더만 내꺼 사달라고 할땐 참.. 맘이 그렇다. 아, 이사람이 피땀 발라가며 번 돈인데.. 싶어서 값이 싸다면 삼디다스 슬리퍼의 줄이 두개밖에 없다고 하더라도 난 그 명품 세줄을 과감히 포기할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 기차시간까지 어느덧 10분 안쪽으로 남아있었고, 주말 영등포역 지하상가로 내 손을 이끌고 맹렬히 돌진하던 Q님은, 하루에 천리를 간다는 적토마보다도 더 고운 삼디다스 슬리퍼를 내게 안겨줬다. 이제 난 일종의 고시생이고, 하루종일 교실에 앉아있으니 스니커즈도 답답해지는 아저씨가 되어가고 있던터라 스레빠가 필요했는데 마침 내 맘에 꼭 맞는 선물이었다. <아아, 요 흰줄 세개는 2010년 1월에 놓여있는 결승선 같고나. 삼디다스 타고 당신에게 날아가리.> 난 내려오는 기차안에서 슬리퍼를 꼭 글어안았다. 혹시 누가 뽀려갈까봐 흰줄에 이름도 써놨다. 데.스.땡.



MB동탁연합군이 화웅앞에서 후덜덜하고 있던 때였다. 이미 목과 머리가 분리된 장수가 여럿있었고, 원소는 절망적인 기분에 안량과 문추를 데리고 오지 않았다는걸 후회하며 찌질거리고 있었다. 이때 복숭아밭에서 유비와 사귀기로 했던 현덕후 관우나 나섰다. <제가 화웅의 경동맥에 빨대꼽아올 수 있다능~ > 하지만, 키보드배틀도 제대로 안떠본 듯한 잣뉴비는 꺼지셈..하던 원소는 덧글도 안달아줬으나, 당시만해도 그나마 개념갤러 조조가 한번 이오공감-_-;으로 나가보라고 추천을 해줬다. 그러면서 더운 술한잔 빨고, 술김에 달려보라며 한잔을 권하자, 관우는 추천수 다섯개 받기 전까지 다시 돌아와 마시겠다며 달려나가 그의 말대로 화웅의 목에 빨대를 꽂아놓고 돌아왔다. 올커니, 아직 이오공감 메인에 뜨지도 않았는데 술이 식지 않았더라.



조금은 촉박했지만, 발권을 무사히 했고 승강장 입구에서 잘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떼어내고 서둘러 플랫폼으로 내려갔다. 뿌우~ 무궁화호 와쪄염~~ 자리를 찾아 앉는 순간까지 아직 Q님과의 데이트가 끝났다는걸 인식하지 못했다. 자리에 앉아 스레빠를 담은 비닐과, 크로스백을 살포시 내려놓고 롯데 델리코너에서 사온 비닐봉다리를 무릎에 놓았다. 무지근하니 들어있는 도시락 세개. '당신은 이거 다 먹을 수 있을꺼야.' 응, 누가 사준건데 남기겠니. 소스가 조금 강해서 주위에 냄새가 퍼지는게 미안하긴 해도 숨가빴던 15분이 지나고나니 허기가 다가왔다. 하나씩 뚜껑을 열어 먹을 준비를 했더니, 그 안의 캘리포니아 롤이 아직 식지 않았더라..

는 뻥이고, 만든지 꽤 지난건데 당연히 식었지. -_-;







수많은 영웅호걸들이 영원히 아웅다웅거리기만 할 것 같았던 삼국지도 180년대 후반에 시작해서 230~240년쯤엔 이미 종쳤다. 무예와 지략을 겨루던 중원은, 환관과 배신으로 뒤덮였고 조씨, 유씨, 손씨들이 아무리 죽자고 싸우면 뭐하나. 결국은 사마씨의 손에 들어가고 말았다. 마초의 사자머리 투구가 아무리 멋있다한들, 초선이 아무리 쎅씨했다고 한들 한바탕 이야기가 끝나고 난 후엔 그저 지난 얘기다. 비가올때까지 기우제를 한다는 제갈량도, 죽은 후에 사마의를 쫓아냈다곤 해도 거기까지다. 강유는 그의 뜻을 이어받지 못했고 재밌는 얘기는 끝났다. 어디까지가 구라고 어디까지가 레전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여간 뽀얀 먼지가 내려앉은 다음은 뭐 둘중에 하나다. 참 좋았었지. 아니면 그게 뭐였더라?


며칠이었는지도 기억안나는 그 영웅호걸적인 연애를 했던 날. 지금은 시간이 꽤 지나버렸고, 혹시나 놓칠새라 꼭 잡고 돌진했던 손은 지금 촉감도 기억이 안나게 되었다. 왜, 어떻게 간극이 벌어졌는지도 모르겠고, 이젠 그냥 가끔 돌이키며, 그래 그랬었었지. 하는 일이 되었다. 되어버렸다. 휴우.....




덧글

  • 페리 2009/06/04 00:49 # 답글

    푸후후후후 이거 제대로 염장?
    뭔가 재밌는 데요 ㅋㅋㅋ 비유가 절묘해요 ㅋ
  • 데스땡 2009/06/04 01:02 #

    네, 헤어진게 부러우시다면...
  • 페리 2009/06/04 01:22 #

    아이코; 중간 내용을 너무 재밌게 봐서 끝을 제대로 못봤군요 ;ㅁ;;ㅁ;
    토닥토닥 ㅠ 죄송해염 ;ㅁ
  • 가하 2009/06/04 01:01 # 답글

    감정이라는건 정말 이상해서 어느순간 좋게도 되고 반대로도 되고. 과거의 영광일지라도 정말 전설스럽게 만나셨네요. 멋있어요. 라고 하면 더 쓸쓸해질까나요.
  • 데스땡 2009/06/04 01:04 #

    아뇨아뇨~ 전설의 인물이 되어, 2000년쯤 지나서 게임이나 소설의 주인공이 되었다고 생각하면 이것도 괜찮군요. 그나저나 전 가하님의 reunion을 진심으로 축하해요. 그래도 대화가 잘 통하는 요철을 두분은 가졌잖아요.
  • 택씨 2009/06/04 06:33 # 답글

    Q님의 눈부신 활약이 전설이로군요!!!
    주말의 영등포역을 원하는 모든 일을 하시면서 15분에 주파를 하시다니... 음.
  • 데스땡 2009/06/04 18:30 #

    네~ 저는 뒤를 따라다니며, 밥 안먹어도 괜찮아~ 스레빠는 나중에 사도 괜찮아~ 기차는 놓쳐도 괜찮아~ 하며 다녔지요. 하지만 모두 이루어냈고, 그런 지금은 스레빠만 남았어요.
  • mew 2009/06/04 08:06 # 답글

    히유우..
  • 데스땡 2009/06/04 18:30 #

    땅 꺼지겠시유
  • 2009/06/04 08:46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데스땡 2009/06/04 18:31 #

    고마워요- 그럼 장소는 디디다겠군요~ (젤 마지막 제안이 제일 땡겨요!)
  • 앨리스 2009/06/04 13:45 # 답글

    데스떙님은 정말 귀엽다
  • 데스땡 2009/06/04 18:31 #

    에..... 앵? -_-; 뭐가요 =_=;
  • 짝궁S 2009/06/04 19:21 # 삭제 답글

    이거야말로 진정한 눈물의 대서사시.
    난 그날 너랑 술먹고 집에와서 노래 틀어놓고 혼자 춤추면서 미친척하고 조금씩 털어내고 있다
  • 데스땡 2009/06/05 15:02 #

    눈물.. 은 아닐테고, 이거 쓰느라 재활공부를 미뤘으니 TP의 대서사시쯤은 되겠다. 연애sucks
  • 2009/06/05 01:23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데스땡 2009/06/05 15:04 #

    방금 다녀왔어요. 그곳도 플랫폼을 제공해주는 서비슨가요? 한때 이글루를 빠져가는게 유행이었을때 저도 잠깐 알아봤다가, 귀찮아 훡유. 했던 거 같아서.
    '역시'는 제 맘대로 칭찬이라고 생각할래요. 알.미.님의 블로그는 그닥 험악하진 않던데요? 아직 발견을 못한건가?
  • 2009/06/05 04:23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데스땡 2009/06/05 15:08 #

    아하. 혼잣말인데 그 대상도 들어버린, 뭐 그런분위기? 하하. 네네 생각나요. 달달이 블로그가 되었다고 두어번 혼났죠. 큿. 하지만 또 이렇게 시시콜콜하게 돌아와버렸으니 그간의 백색단당류 포스팅들은 용서해주세요. 그리고, '시시콜콜'하게 봐주신거나, '시시콜콜'하게 한문장을 해석해주신것 다 고맙습니다. 퓨어한 호기심. 이해할 수 있어요. 저도 비공개님에 대해서 그런 호기심을 갖고 있었으니까요. 이렇게 걸쭉짭짤한 여자는 어떨까. 전 타이밍적절하게 욕을 잘하는 여자에 대한 로망이 있거든요,
  • 2009/06/05 09:00 # 삭제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데스땡 2009/06/05 15:09 #

    부끄럽사옵니다. 전 제 글이 난삽하다고 생각하거든요. 항상.
    갑자기 귀썀을 후려맞듯 닥친 상황이 아니라, 꽤 시간을 거치며 조금씩 대비를 해서 그런가봐요. 사실, 이렇게 한번 피식 웃기엔 무거운 시간이었거든요.
  • 하루 2009/06/05 10:11 # 삭제 답글

    ^^ 그래도 이만큼 재미있게 풀어낼 줄 아는 당신은 진정한 멋쟁이올시다 :)
    p.s. 감부인? 아니죠~ 미부인 맞습니다~
  • 데스땡 2009/06/05 15:11 #

    그니까요. 진정한 멋쟁이를 알아봐주는 세상에서 살고 싶어요.
    그나저나 하루님도 삼덕후였군요. 전 항상 감부인과 미부인을 헷갈렸어요. 이태리계 감베로니 부인이 아니라 미국계 미트소스 부인이었군요. 귀찮으니 수정은 안하겠습니다. -_-; 미부인은 미축의 친지였나요. 갑자기 생각나네요.
  • 베리배드씽 2009/06/05 10:22 # 답글

    그 땐 그랬지. 지금은 좀 씁쓸하지만 그래도 '그랬지'라며 회상할 수 있는 '그 때'가 있다는 건 좋은 일일 거예요.
  • 데스땡 2009/06/05 15:13 #

    비단 연애뿐 아니라 '그때'가 이제 많이 쌓일 시기라서, 좋았던 때들도 등급별, 장르별 분류가 되어가며, 또 분리수거도 되어가는 느낌이에요. 지워지는 그때들도 있다고 생각하니 이거 정말 씁쓸하구만.
  • 2009/06/05 23:11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데스땡 2009/06/06 22:50 #

    님도 낚이셨군요~ 글이 멋지다니 고마워요. 그래도 이렇게 많은 위로를 받으니 기분이 한결 낫네요.
  • 2009/06/07 23:15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데스땡 2009/06/09 23:14 #

    음, 지나서 생각을 해보니 언어가 다른게 유일한 문제는 아닌 것 같아요. 하여간 어려운 것이더라구요. 처음에 불타오르길래 '훗 연애 별거 아니네? 맘만 있으면 모든게 오케이?' 이러고 있었던건 정말 불타오른다는게 전제되어야 했더이다. 그 '노력'이라는게 얼마나 귀한 가치인지, 받아보고 싶은 배려인지 알 수 있었어요. 위로 고맙습니다 :)
  • 오오 2009/06/08 16:09 # 답글

    이렇게 멋지게 회상할 수 있다니요.. 데스땡님은 역시 매력있으세요..
  • 데스땡 2009/06/09 23:14 #

    엉엉 고마워요ㅠㅜ 저도 얼른 좀 팔아주세요!!!
  • 2009/08/10 20:44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데스땡 2009/08/10 20:53 #

    영등포역의 인파와 그 음흉한 냄새는 기억에서 잊혀지지 않지요.
    눈의 그것은 열대야의 산물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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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를 진심으로 애도합니다.